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는 남다른 분이셨다. 얼마나 까다롭고 정확하신 분이셨는지모른다. 당신의 기대치에
맞추지 못하면 야단맞기가 일상이었다.은행에 다니시는 직업이 더욱 그 면을 부채질했는 지도
모른다. 결혼해서 남편과 살아보니 별다른 세계였다. 마음졸이고 통행금지 시간에
맞추려(우리집의 통행금지 시간은 10시였다) 뛰지 않아도 되었고, 내 마음껏 살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통행금지 시간이 나왔으니 말이지 우리집 통행금지 규칙은 정말로 엄했다. 대학교 수업이 일찍
끝나는데 10 시 전에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무엇이 대수이냐고 한다면할말이 없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나는 학교가 신촌이었고 집은 면목동이었다. 아침에는 50번 면목동에서 나오는 버스를 타고
갔는데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에 발을 딛을 수만 있으면 행운이었다. 버스 두대, 세대가 서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버리면 그 다음에 서는 버스는 아예 탈 염두도 낼 수 없었다. 벌때처럼 달려드는
학생들과 출근자들 사이에서 행동이 느리고 악착같이 달려들지 못하는 나는 첫 수업을 포기하고
될대로 되라는 절망감에 빠져버린다. 그래서 한대를 더 보내고 나면 이상하게도 헐렁한 버스가
바로 뒤따라 오곤 했다. 집에 올 때는 망원동 혜원여중을 가는132번을 탈 때가 많았는데 퇴근
시간이 지나가면 한산하여 앉아서 오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항상 문제였다. 그만
졸아서서너정거장 지나서 내리거나 종점까지 가버리면 계산하고 맞춘 통행금지가 아슬아슬하게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무릎꿇고 훈시받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림그리는 써클 화우회의 멤버였던 나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스케치 여행이 있었다. 이후에는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받으며 수양회가 해마다 있었다.비용은 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마련한다
할지라도 이 여행을 허락받을라면 보고서를 작성하여야만 핬다. 스케쥴과 같이가는 사람 최소한
5명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첨부해야만 ‘보내주세요’라고 말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매 번 이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엄마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화가나서 가출을 했었을런지도 모른다. 친구들과
비교해보면 아무도 나처럼 힘들게 사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나는 칠남매의 중간 다섯번 째이다. 위로 언니가 둘, 오빠가 둘, 그리고 여동생과 남동생이 하나씩
있다. 우리 아버지는 퇴근하실 때 쇼빵(그 때는 식빵을 이렇기 불렀다) 한 줄을 사오시거나, 키쓰
쵸코렛 한봉지를 사오셨다. 아버지께서는 나이에 관계없이 늘 똑같은 양으로 나누어 주셨다.
때로는 가위 바위 보를 하며 이기는 사람이 먼저 선택할 수 있었다. 우리는 공평하게 나누기에
익숙했다.
아버지의 독재가 심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엄마말대로 되는 때가 많았다. 큰 언니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에아버지는 은행에 취직시켜주시겠다 하셨다. 돈을 한 번도 벌어본 적이 없는 엄마는
언니를 의대에 보내고 싶어하셨다. 당신의 소망처럼. 보리쌀은 쌀이 아니냐 하며 엄마는 딸을
밀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신 아버지는 형편에 맞지않게 자녀 일곱을 모두 대학에 보내고 말았다.
아들은 세워야되니까 재수를 시켜서라도 보냈고, 딸들은 떨어지면 좋겠는데 의대, 치대, 약대에
잘만 들어갔다. 아버지가 우리 모두를 어떻게 졸업시켰을까 지금도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집에서 사회생활의 기본 훈련을 다 받은 것같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철이없었던 나는 얼마나 울고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던지… 우리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주시고도감사를 받지 못하신 분이다. 성격이 깐깐하시고 매니징 스킬이 부족하셔서 말로주고
되로받으시는 것이다. 정년퇴직 때까지 열심히 일하셨는데 지점장도 못해보시고 지점장대리로
끝내신 분이다. 아버지는 선린 상고를 나오신 수재이신데 정말 창의적이고 똑똑하시다. 그러나
끈기가 없어서 참지를 못하셨다. 엄마를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셨는데 그 표현이 오만 간섭이요
잔소리라서엄마가 화가나실 때가 많았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선산으로 대절한 버스를 타고 가는데 사촌언니가 꼬마도련님 때의
아버지 얘기를 해주셨다. 반찬투정이 너무 심하여 좋아하는 반찬이 나올 때까지 밥상을
숟가락으로 두들기는 꼬마 도련님을 달래기 위해서 미리 접시 두개를 빼놓아야 했단다. 시골에서
용나듯이 공부를 잘하여서울로 유학을가서 그 시절 스케이트를 타고, 정구를 치던 스포일된 젊은
청년이 아버지셨다. 큰집, 작은집 통털어 아버지가 유일한 아들이었단다.
친정을 방문한 내가 우체국이 어디에 있냐고 여쭈어보니 따라오셔서 나의 업무에 해당하는
창구에 곧장 가시더니 ‘장숙아’하고 막무가내로 부르시더라. 달려가 줄 선 분들께 사과를 하고 내
순서에 맞추어 일을 보았다. 새삼 아버지가 늙으셨구나 깨달으며.
미국에 돌아오기 전 날 나를 부르시더니 보시며’나는 살만큼 살았고 너희들 모두가 안정되고
행복하게 사니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얼마 후, 정말 그대로
가버리셨다.
아버지… 덕분에 저 잘 지내고 있어요. 너무나 많은 것을 주시고, 가르치고 훈련시켜 주셨네요.
아버지, 감사해요. 그리고 저는 적어도 말로주고 말로 받는 사람이 되어볼께요. 사랑해요.

김 장 숙 <시네마 덴탈케어 원장> Tel. (661) 253-3030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