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제 화장터에서 큰 가마 앞에서

벽제 화장터에서 큰 가마 앞에서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유리 너머로 제복을 입은 아저씨가 한 줌의
재와 조그만 뼈를 보여주었다. 아버지의 엉치뼈의 남은 일부분이라고 하며 곧 잘 빻아서 재와함께
주겠다고 하였다.
이것이 내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2007년 10월이었다.
큰 오빠는 엄마가 우실까봐 엄마에게는 보여드리지 않고 막내동생을 시켜 잠깐 다른 곳으로
모시고 갔다. 나이가 드시면서 몸이 점점 왜소해지시더니만 저렇게 조그만 물체로 남겨지다가
사라지시는구나. 인생이 지나가버리는 것임에 순간 외로움이 몰려왔었지.
아버지… 하고 가만히 불러본다. 웬지 모르게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우리 아버지는 너무 어렵고도 엄하고 정확한 분이셨다. 평소에 다정하게 손잡고 다닌다던가,
화기애애하게 얘기한다든지 등등 가까이하기는 꿈에서 조차도 불가능했던 그런 분이셨다.그러나
지금은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다니시던 은행에서 정년퇴직을 하시고는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 칠남매를 다 거두지도 못하고
아직도 대학을 마쳐야하는 아이가 셋이나 남았는데 주식해서 날리고, 사기당해 날리고, 퇴직금은
온데간데 없고… 아버지는 촛점 없는 눈으로 밤낮없이 소주를 마시곤 하셨다. 오랫동안의 우울증
같던 방황의 시기를 마무리 하시면서 60대 후반에서 70이 넘어서까지는 내가 소개해드린 치과
기공소의 배달원으로 일하셨다.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사고 없이 정확하게 처리하시는 일솜씨에
기공소 소장님도 고맙다고 하셨고 존경을 받았다.
아버지께서 노인이라고 편안하게 대접받으며 사시기보다는 당신 스스로가 할수
있는데까지 지하도의 계단을 수없이 오르고 내리면서 서울의 끝에서 끝까지
배달다니셨던 그 기백이 좋다. 직업의 귀천과 체면을 차리실만한 세대에 사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하찮은 직종의 일을 정말로 성심껏 하셨던 것이다.
화려했던 젊음과 오만하게 사시던 때에는 가지런했던 치아들도 형편이 어려워지니
한꺼번에 썩어서 뿌러지고 잇몸에 염증이 생겨서 모두 빼야만 했다. 만들어 드린 틀니를
훌러덩 끼시면서 딸 덕분에 편한 틀니를 가지니 고맙다 하시는 말을 들을 때에는 마음이
저렸다. 우리 칠 남매를 모두 키우시고 늙어버리셨구나.
2005년 겨울에 한국을 방문하였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천방지축으로 뛰놀던 그
시절에 돌보아 주셨던 현화엄마의 주소를 어렵게 찾았다. 현화엄마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준비한 돈을 소액환으로 부치려고 아버지께 우체국이 어디인지 여쭈었다. 일산의 백석동
우체국이 집 앞에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 따라오셨는지 줄의 맨 끝에 서있는 나를
바라보시면서 손을 흔들며 부르셨다. 큰 소리로 “장숙아, 이리와라, 여기다. ” 하시면서 한
창구 앞에 꾸부정하게 버티며 서 계셨다. 아버지의 눈에는 기다리며 줄서있는 다른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나만 보이시는 것 같았다. 재빨리 아버지께 다가가서
모시고와서 그 줄의 순서에 맞추어 서서 일을 보았다. 우리 아버지도 이제는 늙으셨구나
생각하면서.

한국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날,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데 나를 따로
부르시더니 ‘나는 이제 너와 너희 모든 형제들이 잘 사는 것을 보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하셨다.아마도 아버지께서는 멀지않아 하늘나라에 가실 것을 아셨나보다.
찌들게 가난하고, 식민지의 잔재와 육이오의 상흔 속에서 성장하고 사셨던 아버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모든 것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시며 남김없이 주셨것만 자녀로부터
따뜻한 허그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하신 아버지…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이 타부시 되고
점잖게 살아야 되는 시대의 유산과 더불어 사셔야 했던 아버지…
그러나 이젠 아버지,
저는 잘 알아요. 힘든 가운데 어떻게 저희들을 잘 키워주셨는지요.
감사합니다.
자식은 내리사랑이라 하니 저도 아버지처럼 똑같이 제 아이들을 잘 키울께요.
아버지, 사랑해요.

김 장 숙 <시네마 덴탈케어 원장> Tel. (661) 253-3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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