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 인디오 여자는 30세가 되면 할머니가 됩니다.

“마야 인디오 여자는 30세가 되면 할머니가 됩니다.”

과테말라 단기 선교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사실이다. 마야 인디오들은 정복자들에게 밀려서 산 속으로 들어가 작은 부락들을 이루며 살고 있다. 높은 산들로 가로막혀 살다보니 자신들의 전통문화와 풍습이 많이 보존되었던듯싶다. 그들은 열다섯 살이되면 부모가 정해주는 사람과 혼인을 하여 애기를 낳는다. 그 애기가 딸이라면 같은 방법으로 15살에 결혼하여 아이를 갖게되니 30세에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 충격적인 사실이 나에게 ‘어떤 사람들이기에’라는호기심을 주었다. 우리 팀은 삼일동안 산마테오 지역의 베델교회에 머물렀다. 그 곳에서 만난 여자 마야 인디오를 겪어보니사람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여자의 모습은 세계 어느 곳이나 같음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들은 애기를 업고 물을 길었다. 불을지펴서 음식을 만들었다. 그들의 손은 고된 노동으로 거칠어졌다. 그러나 함께 모인 곳에서는 까르르 웃는 소리가 나왔다. 우리들을 말똥말똥 쳐다보는 그들의 눈망울은 아름다왔다. 간난애기에게 젖을 물리는 모습도 역시 똑같다. 엄마이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임신이 가능한 생리현상의시작은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시간이다. 마야의후손들인 인디오들은 그 원칙을 낭비하지 않고 잘 지키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비록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을 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섭리에 맞추어 살고 있다. 오히려 문명인인 우리가 자연의 원칙에 따르지않는다. 공부를 많이 하느라고, 경력을 쌓고 일하기를 즐기느라고 결혼을 미룬다. 결혼을 하더라도 자녀갖기를 원치않는 부부도 많다. 그렇다면 우리 쪽이더욱 문제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충현선교교회의 단기 선교 프로그램에 동참했다. 과테말라에 계신 안명수 선교사님을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다니는 충현선교교회의 제 1호 선교사님이시다. 그는 과테말라에서 27년을 보내셨다. 고산지대의 마야 인디오를 찾아 끝도없이 걸어서 선교했던 그의 삶이 그려진 비디오를 보면서 얼마나 감격했던지… 이 다큐메터리 특집은 KBS방송국에서 짜임새있게 잘 만들어서 2000년에 방영된 것이다. 이제 60이 넘어선 그 선교사님과 함께 보낸 일주일의 여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며 돌아왔다.

현지 인디오들의 친구가 되기까지 그들처럼 똑같이 먹고 자는 생활을 한 그였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식물을 끓인 국이며 개미튀김까지그들이 주는 음식은 하나도 마다않고 먹었다한다. 그들은그러한 그를 보면서 부엌의 불 옆에 따뜻한 잠자리를 내주면서 친구로 받아들였다. 그가 B형 간염의 진단을 받은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황혼에 간염으로 치료받으며 고생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물불안가리고 뛰어들어 함께하는 우리 한국인의 정서를 본다. 그렇게 삶을 내어준 그 분이었기에 만나고 싶었다.

LA 에서 출발한 우리팀은 4명이었다. 6월 8일 밤 9시에 우리는 교회에 모여서LAX 로 이동하였다. 밤 비행기를 타고 다음날 새벽에 과테말라시에도착하였다. 현지에서 만난 4명과 합하여우리 모두 8명이 자동차 두대에 나누어 탔다. 우여곡절 끝에 도중에 하루밤을 자고 6월10일 늦은 오전에 베델교회가 있는 빠딸갈 마을에 도착했다. 간단한 인사나누고 점심식사 대접을 받았다. 곧 교회의 장의자를 정돈하여 진료준비에 들어갔다. 이렇게 일을 시작하여 돌아오는 날 6월12일까지3박 4일을 머물렀다. 그 동안 교회 밖에조차한 번도 나가보지 못하고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이를 보상하듯이 돌아오는 길에 겪은 많은 추억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가 사용한 베델교회는 양철지붕이다. 이지붕은 벽으로부터 공간을 두고 띄워져 있다. 밤에 잘 때 찬바람이 사정없이 들어왔다. 우리 방문기간은 우기중이라서 밤에 내리치는 빗줄기는 실내를 춥게한다. 저녁 집회 중에 빗줄기가 양철지붕을 두둘겨대는 소리는 굉장했다. 이 건물이 낮에는 진료하며 환자들이 들어와서 기다리는곳이다. 밤에는 상영하는 영화를 감상하고 목사님이 준비해오신 말씀을 전할때 선교사님이 통역을 하는 집회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밤에는 잠을 자는 공동의 숙소가 되었다.

이 건물의 벽돌벽이 기울어져서 쓰러지는 중이라서 옆의 빈 땅에 교회를 건축하는 중이다. 마을 사람들이 가정의 생계노동 외에 시간을 내고와서 노동봉사를 한다. 그리고 돈이 생기면 재료를 산다하니 어느 세월에 완성이 될까? 그래도 선교사님은 그냥 내버려 두신다. 자기들의 손으로 벽돌을 올리고 문 짝을 쨔서 달아야만 그들의 교회가 된다는 원칙을 갖고 계신다.

함께 가신 우리 목사님은 마을의 베델교회에서 밤마다 세 번의 말씀을 준비하셨다. 그리고 선교사님이 스페니쉬로 통역을 했다. 여자들은 집중하질 못하고 산만하였다. 알고보니 그들은 잘 잘 알아듣 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교육받지못한 그들은 인디오 말인 “추언어”를 쓴다. 재미있는 예화는 일부러 ‘추언어’로 얘기하시니 갑자기여자들과 아이들의 눈이 반짝반짝해지다가 웃음보를 터트렸다. 밤마다 빗줄기가 두둘겨대는 양철지붕아래 모임에서 이루어진 집회는 마을의 큰잔치였다.

간호사인 재키는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 하면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갖은 그녀의감격과 행복은 너무나 컸다. 혈압을 재고 혈당검사를 하도록 만반의준비를 해온그대로 모두가 잘 진행되었다.주형빈 선교사님은 이상하게도 약을 많이 기증받았다고 하시며 모든 약을 가지고 오셨다.우리가 준비해간 진통제, 비타민, 소화제, 그리고 현지에서 준비해주신 회충약, 돋보기 안경들 을 나누어주며, 귀하게 기증받은요긴한 약들을 사용하여 가정병원은 성황리에 잘 운영되었다. 그들을 믿고 의지하여 찾아온 마을 사람들에게 할 수있는대로 다 해주었지만그래도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재키는 남편이 “아까징키 안가져가냐?” 고 지나가며 한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우리 동행 중의 한 분은 웬지 참석하고 싶다며 신청을 하셨다. 그러나 최근에 갑자기 디스크로 진단을 받으셨다. 그로인한 통증으로 여행에 대한 두려움이생기셨는데 차마”못가겠다” 고 말할 용기가 없어서 따라오셨다. 이분이 체험한 치유받은 이야기는 참으로 따뜻한 스토리이다. 한방을 하시는 주형빈 선교사님이 고쳐주셨다. 하나님이 그 분의 손길을 통해서 어루만지실 때 매일 밤 허리가 훈훈해지고 아픔이 없어졌다는 간증이다. “무거운 것은 아무 것도 들지 마세요.” 떠나올 때 부탁받은 아내의 간절한 외침이 더이상 걱정거리가 못되었다. 가만히 도사리고 몸조심해야 할 분이었는데 기쁨으로 청소하며 사진찍고 정말로 많은 일로 도와주셨다.

주형빈 선교사님은 갖고계신 차를 운전하시고 우리와 동행을 하셨다. 선교사님은 조그만 차량에 싣는 짐을 줄이기 위해 당신은 짧은 팔, 긴 팔 티셔츠에 청바지 하나입고 계신 것이 가져오신 모든 소지품이었다. 교회안에서 오가는 길이젖어서 미끄러웠다. ‘우기’라서 하루에 한 번은 소나기가 퍼부었다. 그는봉사하면서 바쁘게 오가는 길에 넘어졌다.단벌신사인 그는 물 진흙이 묻어버린 청바지를 내내 입고 계셨다.

나는 목적지인 인디오 마을에 갈 때 ‘산속으로 운전하며 올라가다보면 엔진이 약해서 차가 선다’ 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간단한 발치기구만 가져가려 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님 부부와 준비를 위한 카톡대화 후에 계획을 바꾸었다. ‘양질의 치과진료’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동식 치과엔진과 이동식 치과의자, 그리고 이동식 흡입썩션모터를 준비하였다. 충치치료를 하기위해 내 치과에 있는 거의 모든 재료와 기구들을 챙겨갔다. 뜻밖에도 과테말라에 도착하여 전혀예상하지 못한동지를 만났다. 안선교사님의 사모님되신 이상희 선교사님이다. 이분이 치위생사 출신일줄이야. 너무도 큰 도움을 받으며 기쁘게 함께 일했다. 그리고 때마침 방학으로 집을 다니러온선교사님 아들 도영이가 합류했다. 그는 완벽한 삼중언어-한국어, 영어, 그리고 스페니쉬-를 말하였다. 도영이가 환자들을 다 정리해주었다.

우리 치과는 정말로 인기가 있었다. 안선교사님은 신이나서 칸막이 커튼까지 쳐주셨다. 야전병원의 모습과 흡사하다고 할까? 그 곳에서 치과는 멀리 차를타고 나가야 한다. 누구나 갈 수있는 곳이 못되는 것 같았다. 진료하며 만난 사람 중에는 어쩌다 한 번 충치치료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 앞니를 금색나는 금속으로 싸거나 금속으로 만든 별을 장식용으로 붙인 여자들도 있었다. 대부분은 치석이 많았다. 벌써 이를 뺐거나 이가 삭아버려서 많이 잃어버렸다. 덧니가 싫어서 무조건 송곳니를 빼달라는 젊은이들을 볼 때가 제일 괴로왔다. 교정을 해주지도 않으면서 빼지 말라고 말하는 내가 모순이었다. 대안이 없는 속수무책에 할말이 없었다.

마을교회의 지도자 되신 휄리뻬 장로님이 내 옆에서 계속 전등을 비추어주며 우는 아이는 달래며 잡아주었다. 인디오 말인 ‘추 언어’로 대부분이 여자인 환자들을통역하며 도와주었다. 여자들의 입속을 이렇게 쳐다보면 수줍어할텐데 괜찮으신지 물어보니 아무 문제 없단다. 그곳 인디오 여자들은 이 점에서는 하나도 거리낌이 없었다.

산 마테오 베델교회에서 만난 키가 작은 인디오 여인이 열심히 물동이에 물을 길었다. 함께갔던 재키가 그 물동이를달라고 했다. 똑같이 등에 지고 연결된 두건을 그들처럼 앞이마에 둘러보니 일어날 수가 없었다. 너무 무겁다고 했다. 그들은 모매가 작고 가냘프다. 그 체격으로 일상생활에서 하고있는 노동들을 생각하니 안스러웠다. 재키가 약을 발라주고 나누어줄 때 만난 여자들의 소톱 밑에 새까맣게 낀 때이며 터진 손등과 뚝살로 갈라지고 두터워진 손들을 보았다고 했다. 재키는 “여자는 똑같애” 하며입술에 바르는 ‘루즈’를 개별적으로 준비해왔다. 나누어줄 때 눈이 반짝이는 여자의 기쁨을 기대하면서 마련한 특별한 기대상품이었다. 그러나 재키의 예상을 뒤없고 이곳의 인디오 여자는 입술에 바르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베델교회에 가면 미국에서하던 식의 샤워는 없어요. 밤에는 나무의자 두개를 붙이면침대로 쓸 수 있어요. 추우니까 주무실 때 껴입을 수 있는 모든 옷을 입고 슬리핑백에서 주무세요. 벼룩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그곳에서 입었던 옷은 오는 날 갈아입을 때 모두 비닐 봉지에 싸서 따로 보관하세요.” 우리가 받은 오리에테이션에서들은 내용이다. 이 무시무시한 설명은 군대에 처음 입대하는 어린 군지원생이 듣는 얘기와 흡사하다. 우리는 삼박사일동안 거울을 보지 않고 제대로 세수도 하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살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함께자고, 일하고 먹었다는 동질감과 결속력은 정말로 굉장하다. 그리고 6월 15일 저녁에 LAX에 도착하고 나니 우리 선교팀네명은누구보다도가까운 형제요 친구가 되어버렸다.

우리에게 ‘선교사가 아니고 방문자’인데 하면서 가능하면 고생하지 않고 편안하도록 배려하고 세심하게 챙겨주신안명수 선교사님의 관심과 사랑에 감사를 드린다.

김 장 숙 <시네마 덴탈케어 원장> Tel. (661) 253-3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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